북한산성은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할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축성되었다. 이 때 백제의 주력군이 이 성에서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았다. 그 후 근초고왕의 북진 정책에 따라 북정군의 중심 요새가 되었다. 그러나 개루왕 21년(475)에 강력한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을 7일간 공격하여 치열한 공방전 끝에 성이 함락되자 백제의 도성도 유린되어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잡혀 살해당했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백제는 공주 웅진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연합 전선으로 막았다. 진흥왕 14년(553)에 신라는 백제의 영토였던 한성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빼앗았다. 진평왕 25년(603) 8월 고구려 장군 고승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하자 신라 진평왕이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였으며 무열왕 8년(661) 5월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 장군 생개와 더불어 북한산성을 20일간 포위 공격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북한산성 성주 동타천은 성 내 주민을 합한 2,800명의 인원으로 필사 결전을 감행하여 이 산성을 방어하였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부흥군이 일어나 곤란에 빠졌던 시기로 만일 북한산성이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면 신라의 삼국통일 판도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중요한 싸움이었다. 성주 동타천은 이 전공으로 대사에서 대내마에 승진되었는데 이 싸움을 삼국사기는 크게 기록하고 있다. 1232년 고려 고종 때는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고려 현종은 글안의 침입을 피하여 이 성에 고려 태조의 신궁을 옮겨왔던 일도 있었다. 이때 성의 중축이 있었고, 1387년 고려 우왕때 개축공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곡성으로 축성론이 일어나고 1711년 숙종 3년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가 시작되어 7,620보의 석성이 완성되었다.
당시 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과 동북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시단봉상에 동장대, 나한봉 동북쪽에 남장대 중성문 서북쪽에 북장대가 있었고 중흥사는 136간의 대사찰이 있었다. 그리고 성내에는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숙종때 군제를 보면 수성대장에 영의정이 겸하고 훈련 어영 금위의 삼군문이 모두 배치되었다. 지금도 대서문이 복원되어 남아 있고 성곽의 여장이 부분적으로 허물어져 있으며 성의 모습은 완전히 보존되어 있다. 최근 대성, 대남, 대동문 등의 외곡성을 비롯해 내성인 중성문도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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