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사의 기원은 652년(진덕여왕 6) 자장율사(慈藏律師)가 향성사를 처음 지은 것에서 비롯됩니다. 이때에는 설악산 동쪽, 즉 이곳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이 사찰은 698년(효소왕 7)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701 년(효소왕 10)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2㎞ 떨어진 지금의 내원암터에 사찰을 다시 짓고 선정사(禪定寺)라 이름을 바꾸었으나, 1642 년(인조 20) 화재를 당하여 그 2년 뒤 운서(雲瑞)·연옥(連玉)·혜원(惠元) 세 스님이 현재의 터에 새로 지어 신흥사라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도 사찰 내부에 많은 건물들이 신축되고 수리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당하였고, 1971년 일주문과 사천왕문 등이 복원되었습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부도와 석비들이 있으며, 세심천에 놓인 세심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에 사천왕문이 나타나고 그 뒤에 신흥사의 중심 공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찰은 극락보전과 보제루·사천왕문이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적묵당과 요사채가 있는 마당 중심의 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배치는 조선 중엽 이후에 세워진 사찰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탑은 새롭게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극락보전 왼쪽에는 명부전이 오른쪽에는 종각이 있고 앞에는 괘불대 두 쌍이 남아 있으며, 명부전 뒤에 삼성각이 있습니다. 극락보전 부속암자로는 계조암과 내원암이 있고 근래에 큰 규모의 요사채가 더 지어졌습니다. 길게 조성된 보제루는 밖의 하단 신중공간과의 공간 구분을 하는 영역이자, 누각 아래를 통하여 중심 공간에 진입하는 전이공간의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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